형식, 그리고 위로.

출근하자마자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왔다. “소식 들었니? OO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대”

순간 머릿 속이 멍해졌다가 OO얼굴 아른거렸다. 20대 초반에게 아버지의 죽음이 어떻게 다가왔을지 상상이 안됐다.

낮 시간에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다가 퇴근 시간이 가까와 오자 다시 OO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얼마나 슬펐을까. 실감이 날까. 얼마나 많은 눈물들이 볼을 스쳐 떨어졌을까.

퇴근길에 장례식장을 들렀다. 접객실에는 여느 장례식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20대의 앳된 친구들이 OO를 위로하러 삼삼오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고, 조용한 이야기 소리와 음식물을 씹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있었다.

 

조문을 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직업군인, OO의 오빠가 상주가 되어 조문객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헌화를 하고 묵념을 했다. 그러곤 가만히 고개를 들어 상주와 목례를 했다. 같이 조문한 일행이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었어요? 상심이 크시지요?”

짧은 머리의 상주는 일일이 어떤 일로 돌아가시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얼마나 많은 조문객들이 물었고, 묻고, 또 물을까.  대답할 때마다 사고의 순간이 얼마나 사무칠까.

접객실에 앉아서 내어온 음식을 가만히 씹었다. 깊은 슬픔의 적막속에 차오르는 포만감에 나의 허기가 민망했다.

“더 드릴까요?”

나의 마음을 알아챈 듯한 질문에 마음이 붉어졌다. 사양을 하고 가만히 앉아서 흘러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비슷하게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근황.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사고의 순간을 생각하고, 그 소식을 접한 순간을 생각하고, … 이곳까지 흘러온 순간을 상상하다,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몇 분쯤이 지났는지 교회분들이 조문을 줄지어 오기 시작했다. 위로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이윽고 예배를 집전할 목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상주가 분주해졌다. 빈소 맞은편에 있던 방을 들락날락했다. 목사의 공지가 시작됐다.

“오늘은 유족께서 예배를 원하지 않으셔서, 찬양을 제외하고 조용한 기도와 말씀으로 예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예배에 함께 하실 분들은 빈소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충격에 벗어나지 못한, 하루 아침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미망인의 요구라고 했다.  ‘위로예배’로 위로를 받아야할 사람과 예배의 궁극적 대상인 하나님 사이 어딘가에서 간극이 느껴졌다.

사람들 사이에 휩쓸려 빈소에 들어갔다. 조용한 묵도와 누군가의 대표기도에 이어, 말씀이 이어졌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뜻이 있을거라는, 하늘에 소망이 있다는 그런 말씀. 그 와중에 방안에서 원치 않던 조용한 예배를 듣고 있어야 할 미망인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같이 하는 조용한 기도. 그 기도 가운데 오른쪽 어딘가에서 누가 들어도 상주의 울음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감히 위로할 수 없을 만큼 탄식이 담긴 울음소리가 빈소에 울렸다. 어깨를 쓰다듬어주어야 할까, 말 한마디 건네야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알량한 위로, 형식적인 위로로 비춰질 모든 행동들을 멈추기로 하고, 기도도 그친 채 울음소리를 묵상했다. 마음 한 구석이 참 슬펐지만, 상주만 할까. 유족만 할까. 내가 그 기분을 이해할 수나 있을까. 이해하지 못하면 위로할 수 없을까.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들이 스쳐가는 사이 예배가 끝났다.

 

그렇게 정해진 형식 위에서 말로, 또 말없는 위로들을 남기고 빈소를 나섰다. 상주의 울음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더욱 슬펐기 때문일까. 미망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고유의 슬픔 위에서 지켜야할 형식들이 새롭게 만들어 내는 슬픔은 누가 위로해줄 수 있을까.

 

이 모든 답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이가 진짜 위로를 전해주길 간절히 바라며.

 

유랑2.

방랑하다,

한없는 어둠으로 빠져들던 찰나

 

이제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못느끼던

무감각한 어둠속에서

 

마.침.내. 빛이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오라.”

 

눈물이 마음으로 흘렀다.

유랑.

검고 검은 우주속을 유랑한다

앞뒤좌우가 분간이 안되는 혼돈

 

빛을 그리고 갈망하다가도

암흑속에 뭔가에 치이고 긁히고 뜯기면서도

또 다시 어둠에 몸을 맡긴다

 

검고 검은 우주속을 유랑한다

나는 방랑한다

비냄새가 나니까 떠오르는 그 날이

빗물이 발에 밟힐때마다 떠오르는 그 발이

빗소리를 들으니까 떠오르는 그 말이

하나씩 떠올라 하나씩

 

비에 옷이 젖을까 조마조마

마주잡은 우산은 흔들흔들

맞닿은 살결에 마음은 콩닥콩닥

 

우산속엔 수줍은 적막과 우리 발소리

그리고 빗소리만

 

죽을 준비.

퇴근 길. 우산을 쓰기엔 애매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왔다.

이상스레 우편함을 두리번 거리던 50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경비실로 다가갔다. 이윽고 펑퍼짐한 가방에서 전단지 하나를 내밀며 참아온듯한 입을 열었다.

“아이, 참. 사실 자식분들께 얘기해야하는데…”

멍하니 신문을 읽던 경비원은 그 여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여성은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익숙한 반응이라는 투로 말을 받았다.

“아니, 상조에 가입 하셨나 싶어서… 보통은 자식들이 준비하긴 하는데, 요즘은 본인이 직접 준비 하시잖아요. 가입하신 거 있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바람에 그 이후는 듣지 못했다. 멍하니 올라갈 층이 표시된 버튼을 꾹 누르고 경비원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자신의 장례를,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

문득 까닭없이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기 위해 늘그막에 사진관을 향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가만히 다시 생각해보니 영정사진이나 상조회사 가입 따위가 죽음을 준비하는 건 아니다. 3일 짜리 장례 준비에 불과하다.

인간은 죽을 걸 알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 한다. 죽음을 기다린다. 그러면서도 하찮은 욕심과 욕망에 몸과 마음을 맡긴다. 가지지 못하면, 더 가지지 않으면 내일이 불안해 미칠것 같아한다.

진정한 죽을 준비는 무엇일까, 어떤 삶이 가치있을까. 죽음을 마주한 채 살아갈 궁리를 한다. 그런 모순 속에 살아간다. 그러고 보니 멀쩡히 살아 숨쉬는 이에게 상조회사 가입을 권유 하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니다. – 남아 있는 자녀를 위해 준비하라는게 참 잔인할 뿐-

죽음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