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상영의 추억.

2000년대 초반, 스무 살 초반 무렵에 심야상영이 유행했다.

지금은 폐관한 정동 스타식스에서 단 돈 만 원이면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최근 개봉한 세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볼 수 있었다. – 심지어 동시상영관이었던 대흥극장에서도 잠시 심야상영을 했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엑소시스터 무삭제판>, 그리고  <나인야드>, <감각의 제국>. <엑소시스트> 외 2편은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기 보단 에피소드 같은 것들 때문이다.

<엑소시스터 무삭제판>은 원래 공포영화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단순 호기심과 친구들에게 이끌려 보게 됐다. 거미처럼 계단 내려오는 장면, 종교적 저주 장면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어서인지 아직도 생각이 난다.

<나인야드>는 조금 기억이라고 하기에 모호하긴 하다. 보통 세 편의 영화를 상영하면 한 편 정도는 보다가 스르륵 잘만한 영화가 껴 있곤 했다. 이 영화가 내겐 그런 부류였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프렌즈>의 챈들러도 나오고, 초반에 왠지 재밌어서 킥킥 거리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대여점에서 빌려서도 보고 – TV에서 했었나?- 세네 번을 보겠다고 시도했는데 이상하게 계속 잠이 들었다. 하루는 작정하고 졸리지 않은 오후에 보겠다고 틀었는데도 잠이 들었다. 나한테는 참 이상한 영화다.

<감각의 제국>은 사실 볼 생각이 없었다. 화제가 되긴 했지만, 오래된 일본영화가 별거 있겠냐 싶었다. 어느 날 대학교 OT 에서 친해진 무리와 심야영화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여학우 2명이 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과 보겠다는 의지가 너무 심해 보게 되었다. 당시 뉴스로 여성들이 관람 중에 뛰쳐나갔다는 기사도 있었고 했다. 그래서 인지 영화보단 옆에 앉았던 여학우들 반응을 더 살폈던 것 같다. (아무도 뛰쳐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일까? 지금 생각해보니 내용이 딱히 생각이 안난다.

 

그렇게 세 편을 보고나면 같이간 친구들과 부시시한 얼굴로 아침을 맞이한다. 화장실에 가서 대충 얼굴-에 가득한 기름기-을 씻고 극장 앞에서 손을 흔들고 헤어진다.  오후에 다시 일어나면 봤던 영화가 꿈인지 실화인지, 내용이 어땠는지 아득하다. 그래서인지 정작 어떤 영화를 누구와 무엇을 봤는지 가물가물하다. 오래된 탓도 있겠지만, 함께 밤새 무언가 같이 집중해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즐거웠던 시절인 것 같다.

시간 여유가 넘쳤던 시절의 이야기다.

니모, 알로.

설 연휴 때 애니메이션 두 편을 시청했다.

하나는 지난 주말에 온 손님들과 함께 본 ‘굿 다이노’. 사실 스토리보다는 실사라고 해도 믿길만큼 사실적인 작화가 기억에 더 남지만 주제는 참 맘에 들었다.
그리고 EBS에서 ‘니모를 찾아서’를 방영하길래 이미 아이도 보고 나도 보았지만 다시 한 번 시청했다.

약간 초점은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주인공들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성장하는 것과 결국 그 모든 것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굉장히 유사했다. 그리고  주인공(‘니모를 찾아서’의 니모와 ‘굿 다이노’의 알로)들이 신체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비슷하다.

니모는 어릴 때 사고로 한쪽 지느러미가 다쳐 헤엄도 빨리 못친다.
알로는 가장 큰 알에서 태어났지만 몸집이 작고 머리가 커서 균형도 잘 못잡고 힘도 못쓴다.

이런 주인공들이 어쩔수 없이 겪게되는 환경과 주변의 도움(물론 괴롭히는 장애물도 참 많다!)을 통해 성장한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돌아간다.

이런 작품을 통해 모자란 부분이나 장애를 극복하는 힘과 또 자신보다 무언가 모자란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도와줄 수 있는 마음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더욱 성장하고 보살핌 받을거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부모가 되고 나니 이런 관점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특히 장애에 대한 부분을 눈여겨 보게되는 것은 사회복지를 하고 있는 누이에게 세뇌된 측면이 있다.

이것도 저것도 어쩔수 없다.

끌리는 건조함. 김예림.

 
 
코안이 뻑뻑하다. 코를 풀면 가끔 코피가 난다.
건조한 겨울을 나고 있다는 대표적인 내 몸의 증거들이다.
그런데, 요즘은 음악을 찾아 듣기도 귀찮을 정도로 마음도 건조해졌다.
 
무료한 퇴근길에 손가락을 스마트폰 액정에 대고 휘릭 휘릭 위아래로 휘저으며, 아무 생각없이 음악을 찾아본다.
그러다 건조한, 선율이 없으면 코딱지가 마구 쌓이고, 코피가 날 것만 같은 그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평소 목소리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평소 목소리는 못 들어봤다.)
 
건조한 공기 속에 서 있는 건조한 마음의 사람도, 선율이 더해진 그녀의 건조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면, 마음이 이내 촉촉하게 변할지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김예림의 목소리는 발랄함이 넘치는 노래보다는 이렇게 뭔가 적적한, 절제된 노래들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래서 어거지로 수식어를 만들어봤다. 끌리는 건조함. 김예림.
 
 

이승환, 김예림 – 비누

토이(with 김예림) – 피아니시모

 

영화 프랭크 :: Frank (2014)

 
 
사람들은 동경한다. 창조력이 넘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창조력의 부스러기라도 가지고 싶어한다.

행동을 관찰한다. 사고와 사상을 받아들인다. 선물을 준다. 호의를 베푼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그 사람과 관계를 깊게 유지하면서 창조력을 모방하고자 한다.

그러다가 그 사람의 면면을 알아간다. 그리고 반응한다. “음 생각보다는 별게 없는 사람이군”, “아, 도대체 이런 사그라지지 않는 창조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지?” 등등.
 
 
희한한 가면을 쓰고 다니며 밴드의 모든 음악을 작곡하는 리더 프랭크씨.
(개인적으로 하는 짓이 독특하긴 하지만, 음악은 영… 별로다!)
음악 작곡능력은 토끼통만큼도 없는 존.
존을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밴드 멤버들.
 
 
존은 프랭크를 동경하고 시샘한다. Wannabe FRANK 존. 그리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와 친해지고 함께 생활하다보면 나도 창조력이 생기지 않을까.’
‘창조력의 비밀은 가면에 있는게 아닐까.’

존은 창조력을 훔치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계획은 존의 뜻대로 진행되는 듯 보이지만, 존의 작곡능력은 도통 늘지를 않는다.
 
 
그러다 알게 된 프랭크의 실체.

특이한 행동들은 정신병일 뿐이라는 것.
정신병이나 가면은 되려 프랭크의 음악적 재능을 막는 도구였다는 것.
 
 
존은 특별함이 사라져 더 이상 관계할 ‘필요’가 없는 프랭크를 떠난다.
그러나 가면을 벗은 프랭크 곁에는 있는 그대로의 프랭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특이한’ 밴드 친구들이 있다.

그들이 프랭크와 함께 노래하고 있다. ‘I LOVE YOU ALL!’

 
 
문득, 사람과 사람 간의 순수하고 건강한 관계/공동체가 그리워진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을 인정하고 편견 없이 목적 없이 받아들이는 공동체.
나보다 서로를 더 낫게 여기고 먼저 베푸는 공동체.

그 속에서는 특이하고 모난 성격이나 모습들도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는 요소에 불과할 것이다. 토라짐도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로 치부될 것이고, 날 선 비판도 서로를 위한 충고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fin.

 

영화 인터스텔라 (Interstellar) – 너와 나의 연결고리는?

 
(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게다가 글도 재미가 없어요!)

인터스텔라는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중력방정식, 블랙홀, 특이점 등(쓰면서도 뭔지는 모른다) 복잡한 물리 이론들이 난무하지만 <메멘토>, <인셉션>, <프레스티지>보다는 이야기 구성이 꽤 단순한 편이어서 영화를 본 주변 사람들의 호들갑에 비하면 이해가 어렵지 않다.

갈등 구조 또한 단순하다. 주인공인 쿠퍼 일가를 포함한 전 인류는 머지 않아 멸망할 위기에 처해있고, 그래서 이제는 구닥다리가 된 먼 옛날 개척정신을 다시금 발휘하여 인류, 아니 사랑하는 가족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 전부이다.

 

주인공 요셉 쿠퍼는 사랑하는 가족의 구원을 꿈꾸며, 아멜리아 브랜드는 연인인 에드먼드와의 재회를 꿈꾸며 대체행성을 찾아 우주여행에 나선다. 도일과 로밀리와 함께.

토성 근처의 웜홀을 통과한 후 밀러 행성과 만 행성을 지나면서 도일과 로밀리, 그리고 만 박사는 모두 죽고 쿠퍼와 아멜리아는 에드먼드 행성까지 가기 위해 블랙홀을 이용하기로 한다.

이 때, ‘5차원’이 등장하면서 탈 이성의 영역이 등장한다. 진보한 미래의 인류로 표현되는 ‘그들(유령)’의 도움으로 쿠퍼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과거의 자신과 머피(딸)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중력방정식을 풀 수 있는 특이점의 관측 데이터를 현재의 머피에게 전송하는데 성공한다. (너와! 나의! 연결! 고리!)

이내 5차원 공간은 닫히고 인류는 머피 쿠퍼의 도움으로 스페이스 콜로니로 이주 정착하여 플랜A로 구원 받는다. 쿠퍼는 우주공간을 떠돌다 토성 근처에서 발견되어 첫 대체행성 찾기 프로젝트명인 ‘나사로’처럼 부활하고, 아멜리아는 인류가 살기에 적합한 행성인 에드먼드 행성에 무사히 도착하여 죽은 연인을 기념한다.(플랜B도 성공한 셈이다)

 

(쓸데없이, 굳이, 이야기 흐름을 몇개 풀어 썼다.)
결국 영화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의지적인 사랑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을 믿었던 사람들 -쿠퍼, 머피, 아멜리아…-은 인류 구원에 기여하였지만,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신봉했던 사람들-존 브랜드, 만 박사, …-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모더니즘(이성과 과학)으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구원의 문제를 포스트 모더니즘(신비)으로 도약한다.
이 때문일까? 나의 세계관과 영화의 세계관이 충돌하는 순간-블랙홀을 통과하여 5차원이 등장하는 시점-부터 이야기는 논리의 힘을 잃고(포기하고) 유령을 의지하는 신세로 전락하는 듯 보인다.

정말 인간의 ‘의지적인 사랑의 능력’만으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세계관의 괴리와는 별개로 나에게도 아내와 아이가 생긴 탓인지 영화가 주장하는 사랑의 힘이 어느정도 전해져 왔다. 그리고 스크린을 압도하며 전해지는 우주여행의 신비감과 긴장감 그리고 역동성은 <인터스텔라>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하게 만든다.

(< 그래비티>의 정적이지만 긴장감 있고, 우아한(?) 느낌과는 분명히 다른 영상미가 있다.)

 

++ 사실 나는 2001년 남산 감독협회 시사실에서  <메멘토>를 접한 이후부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팬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