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안녕하세요. 예쁜이~ 안녕~”
– 안녕하세요.! 온유야 할아버지께 인사해야지.
“예~뻐요! 인사도 잘~하네!”
우리 동 경비 할아버지는 두 분이다. 하루씩 교대로 근무하시는데, 그 중 한 할아버지가 온유를 유독 예뻐하신다. 다른 일을 하시다가도 온유와 내가 지나가면 일부러 일어서서 온유에게 인사해주신다. 자길 예뻐하는 걸 아는지 온유는 두 경비 할아버지 중에서도 그 할아버지를 참 좋아한다. 감사한 마음에 들어오는 길에 산 홍시 봉지에서 두 알을 꺼내 드렸다.
– 씻어 드세요. 맛이 좋아보이더라구요.
“안녕하세요”
– 어, 안녕하세요. 여기 어린이집에 아기 보내시나봐요.
“네~ 몇 달 됐어요. 이제 곧 복직하니까요.”
아파트 1층에 있는 어린이집에 또 한명의 아이가 다니나보다. 우리집 같은 라인, 1층에 사는 아기다. 온유보다 7개월 늦은 아기는 꽤 순하게 보였었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육아휴직 중인 아기의 엄마는 아기와의 일상이 지루한지 늘 아기띠를 한 채로 아파트 주변을 서성였는데.. 이제 이 아기도 어린이집에 적응하게 되고 일하는 엄마를 기다리게 되겠지. 가끔 놀이터에서 만나면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던 상대가 하나 또 사라지는군.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어머나 애기가 고새 많이 컸네”
4층에 사시는 할머니시다. 바퀴가 달린 작은 의자를 끌고 다니시는데 거동이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다. 그런데도 뵐때마다 항상 손에는 여러가지 도구를 쥐고 계신다. 어떤 날은 가로수 은행 열매 채취용으로 보이는 기다란 작대기, 어떤 날은 폐지묶음, 어떤 날은 기다란 집게. 오가며 많이 마주친 터라 얼굴이 익어 이제는 온유와 함께 인사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 아파트에서 살게 된 지도 어느 덧 만 4년을 채워간다.
둘이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셋이 되었네. 내일은 한글날이군. 휴일인데 뭘 하며 보내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온유와의 외출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 현관 앞에는 박스 두 개가 놓여져 있다. 큰 박스 하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돌아오는 재활용쓰레기 모음용, 또 다른 하나는 날이 좋을 때마다 아파트 옆 간이놀이터에서 온유와 자주 가지고 노는 모래놀이 장난감 셋트… 응? 어디갔지?
어디갔지???? 아까 나갈 때 만해도 분명히 있었는데!!!!!
온유 백일선물로 받은,, 모래놀이셋트 주제에 꽤 고급진 외관과 꽤 비싼 가격을 자랑하는 모래놀이장난감이 사라졌다.
아.. 놀이터에서 온유랑 모래놀이하면 꽤 폼나는 그런 장난감이었는데.
날이 좋으면 자주 나가서 노는터라 항상 모래가 묻어있어 현관 앞 박스에 잘 넣어뒀는데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아 대체 누가 가져간거야!!!!!!!!!!’
씩씩거리며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무 종이나 꺼내들어 글씨를 휘갈겨썼다.
ㅡ7층 현관 앞 박스에서 아기 장난감 가져가신분 보세요. 대체 가져갈 게 없어서 아기 장난감을 가져갑니까? CCTV돌려보기 전에 어서 도로 갖다놓으세요. 참 양심에 털나셨네요!!!ㅡ
남편은,
1. 쓰레기 처리하기에 좋아보여서 어떤 노인들이 가져갔거나
2. 아기가 있는 집에서 가져갔을거라고 했다.
공휴일이 지나고 분이 덜 풀린 나는 아파트관리실로 향했다.
개인정보동의란에 서명을 하고는, 장난감이 없어진 당일- 아침부터 내가 외출했다가 돌아온 시간까지의 엘리베이터 CCTV를 확인했다.
이른 아침, 꽉 찬 핸드카트를 들고 나가시는 할머니
점심 즈음, 뭔가 가득 들어있는 등산가방을 들고 나가시는 할아버지
4층 할머니는 이 날도 저렇게 뭘 들고 자주 왔다갔다 하셨네.
1층 사는 아기엄마가 엘리베이터를 타네? 계단운동하나..
허탈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자신있게 써 붙인 종이를 떼어냈다.
‘에잇, 그래. 애초에 없어진걸 찾겠다는 기대가 쓸데 없었지..’
그리고 애써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 다음 달 괌에 놀러가면 온유랑 바닷가에서 모래놀이하며 멋지게 사진 한 컷 찍으려고 했었는데..
나중에 온유가 크면 넌 어렸을 때 이런 고급진 모래놀이셋트가 있었더라며 우쭐댈 수 있었는데.. 라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같은 걸 다시 살까 검색해보니 4만원이다. 4천원이어도 살까말까한 판에 4만원이라니. 비싸긴 하네. 에잇, 그냥 잊어버리자.
며칠이 더 지났다.
종일 온유랑 집에서 뒹굴거리던 나는 오후가 돼서야 저녁 찬거리가 없음을 깨달았다.
‘아, 귀찮아…. 나가서 사와야 하나’
세수도 안 한 얼굴로 모자를 썼다.
– 온유야, 엄마랑 어~야! 갔다올까?!
1층에 내려갔더니 온유를 예뻐하는 경비 할아버지가 계셨다.
그리고 그 앞에 1층 아기엄마가 평소처럼 아기띠로 아기를 안은 채 1층 복도를 서성거렸다.
– 안녕하세요.
차를 타고 마트를 갔다. 저녁 찬거리만 대충 산 뒤 30분 만에 얼른 집으로 돌아왔는데,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응? 없어졌던 모래놀이셋트가 제 자리에 놓여있었다. 모래와 물기가 묻어있는 채로, 급하게 휙 던져진 듯.
머릿 속으로 그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범인은… 당신 이었구나.
이틀이 지나고 아파트 관리실을 다시 찾았다.
– 안녕하세요, 지난번 아기 장난감때문에 CCTV확인했었던..
“네~ 안녕하세요, 어떤 일이신가요?
– 하나만 더 확인하고 싶은게 있어서요.
2014/10/15 17:25:02 #1층 복도 CCTV
남색 모자를 쓴 나와 빨간색 모자를 쓴 온유가 외출을 한다.
경비실 쪽으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사를 한다.
아기띠를 한 아기엄마는 쭉 그랬 듯 왔다 갔다 복도를 서성인다. 그리고 잠시 후 오른쪽 복도 끝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아기띠와 워머를 착용한 채로 엘리베이터를 탑승한다.
2014/10/15 17:30:15 #엘리베이터 CCTV
엘리베이터에 탄 1층 아기엄마는 “9층”을 누른다.
워머를 덮은 아기띠 속 아기는 잠잠히 있다. 아기 엄마는 아주 잠깐 CCTV를 응시한 뒤 바로 왔다 갔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린다.
9층 도착, 아기 엄마는 내려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2014/10/15 17:35:25 #1층 복도 CCTV
계단 방향으로 아기엄마가 내려왔다.
2014/10/15 18:02:30 #1층 복도 CCTV
외출한 온유와 내가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탑승한다.
이렇게 온유의 꽤 고급진 모래놀이장난감은 근 일주일 간의 외출을 마치고 제 자리로 돌아왔다. 아, 삽 하나를 잃어버린채로..
경희언니는 말했다.
“마주치면, 왜 삽은 빼셨어요? 라고 물어봐!!”
이제는 동네에서 낯선 사람과 말을 섞지 않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우리 동 사람으로 보이는) 아저씨나 아줌마가 온유에게 인사해도 평소처럼 “온유야 너도 인사해야지”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미소만 지어보인다.
어쩐지 씁쓸해졌다.
그리고, 옆 집 아기엄마에게만 살짝 얘기해두었다.
– 모래놀이셋트 찾았어! 범인은… 나중에 이사가게되면 알려줄게.. 복도에 뭐 내놓고 그러지마.
그 새 바람이 많이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