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결백 (★☆)

장례식장부터 시작되는 첫 장면. 롱테이크가 인물들을 다이나믹하게 훑으면서 기대감을 고조시킵니다. 그러다 농약이 든 막걸리를 마신 몇몇이 구토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 숨겨진 가족사+ 추잡한 동네사(?)를 바탕으로 엄마의 결백을 주장하는 변호사 딸의 고군분투기가 펼쳐집니다.

영화는 마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모두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같습니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너무 정말정말 친절하고 의미심장합니다. 그래서인지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뻔해서 앞의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예상이 되어버립니다. 첫 장면에서 심어준 기대감은 온데간데 없고 치달아야 할 긴장감도 힘을 잃은 채 이야기는 신파로 흘러갑니다.

[M] 사라진 시간 (★★)

사실과 기억. 자기자신의 기억, 타인의 기억 속에서 알수 없는 사실에 관한 이야기.

영화 초반은 장진 감독의 초기작 같은 부조리극이 지배하다가 후반은 홍상수 내지는 장률 감독 작품에서 느끼는 모호함이 지배합니다. 극 중 내내 긴장감이 고조되다가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명확하게 해소된 것 하나없이 모두 내팽개쳐집니다.

박형국 형사(조진웅)가 사건을 맡으면서 알게된 타인의 기억과 자신의 기억이 꿈에서 조합되어 조작된 사실 같은 꿈을 꾼 것에 불과할까요? 그리고 정신과 의사의 말처럼 꿈에서 깨어남으로써 무의식속 찌꺼기 같은 기억이 정리된 것일까요?
( “참 좋다~”로 시작해서 “참 좋다~”로 끝나는 꿈. 관객의 기분은 참 좋지 않습니다.)

감독이자 작가는 자기 스스로 인식하는 자신과 타인(사회)이 인식하는 자신, 즉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결론을 내지않고 열어둠으로써 관객에게 ‘알아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거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평론가는 호평을, 관객은 혹평을 날린다고 하는데 저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결론을 내지 ‘못한’ 작가의 무책임함으로 느껴지기 때문이죠. 평론가의 호평도 수긍이 되질 않습니다. 감독 정진영이 추구하는 연출이나 이야기 포트폴리오가 쌓여있지도 않은데 포스트모더니즘식 처녀작에 호평이라니.

[M] 어느 가족; Shoplifters; 万引き家族 감상기

! 스포일러 주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 2018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영어제목도 그렇고 원제는 <좀도둑 가족(万引き家族)> 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개봉하면서 <어느 가족> 개명을 했다. 좀도둑 가족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왠지 모르게 코미디영화처럼 비춰질 수 있어서 바꾼게 아닐까 싶다.

이해는 되지만 아쉽다. 영화는  ‘가족의 본질’에 대해 묻고 대답하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둑질’이 이야기의 중심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도둑질’로 가족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도둑질’로 가족 공동체가 연명한다. 그러다 ‘ 도둑질’이 발각되자 가족 공동체의 붕괴가 일어난다.

이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방치된 아이들이 가족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2004)>가 생각났다. 꼭 아이들이 할머니, 성인, 청소년, 어린이로 확장된 가족으로 재탄생한 느낌을 받았다.

영화는 혈육이 아니지만 이렇게 따뜻한 가족 공동체가 있다면 어떨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한 한계를 지적한다. 각자의 속사정과 그들간의 유대, 정을 알리없는 제도권 형사들은 현상만보고 이 공동체를 물질 공동체로 격하시킨다. 생물학적 가족, 사회복지제도, 고용제도의 한계. 어쩌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한계랄까?

 

이 영화가 대단한 몇가지 이유.

먼저, 가족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세상에 없는 따뜻한 가족을 가상으로 만들어냈음에도 차가운 현실 속에 살아가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게가 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훔치던’ 낭만적인 도둑질을 하며 서로 보듬는 따듯한 가족은 끝내 법이라는 사회제도를 통해 해체된다.

그리고 하나의 ‘가족’을 크게 조망하면서도 그 가족에 속해 살아가는 ‘구성원’의 입체적인 삶의 모습을 하나도 잃지 않았다. 자식하나 없이 연금과 위자료로 연명하는 할머니부터 부모가 되고 싶지만 되지 못하는 부부, 할머니만 의지하는 애정결핍 소녀, 아빠라고 절대 부르지 않지만 누구보다 아빠를 신뢰하는 소년, 친모에게 아동학대를 당하던 어린소녀까지.

마지막으로 관객은 영화 중간에나 돌아가는 길에서, 아니면 자기 전 양치질을 하면서 생각할 것이다.  주어졌든 선택했든 내가 속한 가족 공동체에 대해서. 무엇이 진정한 ‘가족’인가? 당신은 진정한 ‘가족’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삐뚤어진 생각과 행동으로 ‘가족 구성원’을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전작보다 각자 인생의 배경과 의도, 감정에 대해 굉장히 친철하게 설명해주는 영화이다. 그럼에도 과함이 없게 느껴지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비현실적인 이 가족이 지독한 현실에 처해있기에 이런 부연들이 필요했던 것 아닐까 싶다.

 

나는 글을 쓰는 이 순간 아내, 아들들, 부모를 대하는 나를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된다. 그러는 한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차기작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

영화 프랭크 :: Frank (2014)

 
 
사람들은 동경한다. 창조력이 넘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창조력의 부스러기라도 가지고 싶어한다.

행동을 관찰한다. 사고와 사상을 받아들인다. 선물을 준다. 호의를 베푼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그 사람과 관계를 깊게 유지하면서 창조력을 모방하고자 한다.

그러다가 그 사람의 면면을 알아간다. 그리고 반응한다. “음 생각보다는 별게 없는 사람이군”, “아, 도대체 이런 사그라지지 않는 창조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지?” 등등.
 
 
희한한 가면을 쓰고 다니며 밴드의 모든 음악을 작곡하는 리더 프랭크씨.
(개인적으로 하는 짓이 독특하긴 하지만, 음악은 영… 별로다!)
음악 작곡능력은 토끼통만큼도 없는 존.
존을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밴드 멤버들.
 
 
존은 프랭크를 동경하고 시샘한다. Wannabe FRANK 존. 그리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와 친해지고 함께 생활하다보면 나도 창조력이 생기지 않을까.’
‘창조력의 비밀은 가면에 있는게 아닐까.’

존은 창조력을 훔치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계획은 존의 뜻대로 진행되는 듯 보이지만, 존의 작곡능력은 도통 늘지를 않는다.
 
 
그러다 알게 된 프랭크의 실체.

특이한 행동들은 정신병일 뿐이라는 것.
정신병이나 가면은 되려 프랭크의 음악적 재능을 막는 도구였다는 것.
 
 
존은 특별함이 사라져 더 이상 관계할 ‘필요’가 없는 프랭크를 떠난다.
그러나 가면을 벗은 프랭크 곁에는 있는 그대로의 프랭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특이한’ 밴드 친구들이 있다.

그들이 프랭크와 함께 노래하고 있다. ‘I LOVE YOU ALL!’

 
 
문득, 사람과 사람 간의 순수하고 건강한 관계/공동체가 그리워진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을 인정하고 편견 없이 목적 없이 받아들이는 공동체.
나보다 서로를 더 낫게 여기고 먼저 베푸는 공동체.

그 속에서는 특이하고 모난 성격이나 모습들도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는 요소에 불과할 것이다. 토라짐도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로 치부될 것이고, 날 선 비판도 서로를 위한 충고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fin.

 

영화 인터스텔라 (Interstellar) – 너와 나의 연결고리는?

 
(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게다가 글도 재미가 없어요!)

인터스텔라는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중력방정식, 블랙홀, 특이점 등(쓰면서도 뭔지는 모른다) 복잡한 물리 이론들이 난무하지만 <메멘토>, <인셉션>, <프레스티지>보다는 이야기 구성이 꽤 단순한 편이어서 영화를 본 주변 사람들의 호들갑에 비하면 이해가 어렵지 않다.

갈등 구조 또한 단순하다. 주인공인 쿠퍼 일가를 포함한 전 인류는 머지 않아 멸망할 위기에 처해있고, 그래서 이제는 구닥다리가 된 먼 옛날 개척정신을 다시금 발휘하여 인류, 아니 사랑하는 가족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 전부이다.

 

주인공 요셉 쿠퍼는 사랑하는 가족의 구원을 꿈꾸며, 아멜리아 브랜드는 연인인 에드먼드와의 재회를 꿈꾸며 대체행성을 찾아 우주여행에 나선다. 도일과 로밀리와 함께.

토성 근처의 웜홀을 통과한 후 밀러 행성과 만 행성을 지나면서 도일과 로밀리, 그리고 만 박사는 모두 죽고 쿠퍼와 아멜리아는 에드먼드 행성까지 가기 위해 블랙홀을 이용하기로 한다.

이 때, ‘5차원’이 등장하면서 탈 이성의 영역이 등장한다. 진보한 미래의 인류로 표현되는 ‘그들(유령)’의 도움으로 쿠퍼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과거의 자신과 머피(딸)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중력방정식을 풀 수 있는 특이점의 관측 데이터를 현재의 머피에게 전송하는데 성공한다. (너와! 나의! 연결! 고리!)

이내 5차원 공간은 닫히고 인류는 머피 쿠퍼의 도움으로 스페이스 콜로니로 이주 정착하여 플랜A로 구원 받는다. 쿠퍼는 우주공간을 떠돌다 토성 근처에서 발견되어 첫 대체행성 찾기 프로젝트명인 ‘나사로’처럼 부활하고, 아멜리아는 인류가 살기에 적합한 행성인 에드먼드 행성에 무사히 도착하여 죽은 연인을 기념한다.(플랜B도 성공한 셈이다)

 

(쓸데없이, 굳이, 이야기 흐름을 몇개 풀어 썼다.)
결국 영화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의지적인 사랑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을 믿었던 사람들 -쿠퍼, 머피, 아멜리아…-은 인류 구원에 기여하였지만,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신봉했던 사람들-존 브랜드, 만 박사, …-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모더니즘(이성과 과학)으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구원의 문제를 포스트 모더니즘(신비)으로 도약한다.
이 때문일까? 나의 세계관과 영화의 세계관이 충돌하는 순간-블랙홀을 통과하여 5차원이 등장하는 시점-부터 이야기는 논리의 힘을 잃고(포기하고) 유령을 의지하는 신세로 전락하는 듯 보인다.

정말 인간의 ‘의지적인 사랑의 능력’만으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세계관의 괴리와는 별개로 나에게도 아내와 아이가 생긴 탓인지 영화가 주장하는 사랑의 힘이 어느정도 전해져 왔다. 그리고 스크린을 압도하며 전해지는 우주여행의 신비감과 긴장감 그리고 역동성은 <인터스텔라>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하게 만든다.

(< 그래비티>의 정적이지만 긴장감 있고, 우아한(?) 느낌과는 분명히 다른 영상미가 있다.)

 

++ 사실 나는 2001년 남산 감독협회 시사실에서  <메멘토>를 접한 이후부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팬보이다.